전시 · 대구
Palimpsest : 겹쳐 쓰기
2026-09-11 ~ 2026-12-02 · 021갤러리

행사 소개
Palimpsest : 겹쳐 쓰기 모든 것이 새롭지 않다. 허구는 일종의 진실이다. 풍경과 오래된 문장을 수집하고, 기억과 상상을 엮어 새로운 장면으로 재구성해 온 진민욱 작가의 개인전 《Palimpsest : 겹쳐 쓰기》가 9월 11일부터 12월 2일까지 021갤러리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19년 《소소경(逍小景)》 이후 021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으로, 그동안 확장되어 온 ‘산책’과 ‘시 필사’를 중심으로 한 신작 20여 점을 소개한다. 진민욱은 오랫동안 걷는 행위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관찰하고 수집해 왔다. 2017년부터 이어 온 ‘걸으면서 보기(逍小景)’ 작업은 하나의 나무와 작업실 주변의 미시적인 풍경에서 시작해 점차 더 넓은 장소와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여기에 최근 오래된 시와 문장을 읽고 옮겨 쓰는 ‘필사’의 과정이 더해지면서, 실제로 마주한 풍경과 기억, 문학적 상상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교차하며 작업 세계의 깊이를 더한다. 전시명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이미 쓰인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전의 흔적과 새로운 기록이 하나의 표면에 겹쳐 남는 상태를 의미한다.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는 수필집 『다정한 서술자』에서 문학적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을 설명하며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The Prelude)』을 예로 든다. 그는 세계를 거대한 직조물처럼 바라보며, 분절된 세상의 파편을 다시 이어 붙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유대의 힘에 주목한다. 그가 작업에 직접 인용한 “바위와 열매, 꽃, 길가에 나뒹구는 돌들에게까지 각각의 자연물에 도덕적인 삶을 부여했기에, 나는 그것들이 느끼는 걸 보았네”라는 구절 역시 이러한 관점과 맞닿아 있다. 작가에게 풍경은 눈앞에 놓인 하나의 완결된 장면이 아니라, 그곳에 축적된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이 끊임없이 덧입혀지는 장소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일상적인 장소를 걷는 ‘산책’이라는 개인적 체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 속 무대를 조사하고 직접 찾아가는 적극적인 ‘답사’로 작업을 확장한다. 지난 2년간 고전 노래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직접 걷고, 그곳의 현재 풍경과 사건의 흔적을 관찰하고 수집했다. 동시에 동서양의 오래된 시와 문학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고 기억해 온 방식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킨다. 이 과정에서 수집된 풍경과 문장은 화면 위에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실제로 본 것과 기억한 것, 읽은 것과 상상한 것이 서로 스며들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놓인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나타난다. 기억 속에서 어떤 장면은 선명해지고 다른 장면은 희미해지듯, 작가의 화면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과 이미지가 겹쳐지고 지워지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러한 서사의 확장과 더불어 진민욱이 지속해 온 회화적 표현의 변화를 함께 보여준다. 전통회화를 기반으로 작업해 온 작가는 익숙한 재료와 형식을 반복하기보다, 오늘의 풍경과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회화의 확장 가능성과 재료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탐구해 왔다. 《서곡(Prelude)》(2026), 《종달새에게 길을 묻다》(2026), 《유대》(2025)를 비롯한 신작들은 오래된 문장에서 출발하지만, 작가가 직접 걷고 경험한 현재의 시간과 만나 또 하나의 새로운 장면으로 펼쳐진다. 진민욱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중국 중앙미술학원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어제 걸은 길》(한원미술관, 2022), 《펼쳐지고 깊어지는》(영은미술관, 2023), 《Fragile Dialogue》(통인화랑, 2024) 등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24년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Palimpsest : 겹쳐 쓰기》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읽고, 걷고, 바라보는 진민욱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오래된 이야기와 오늘의 풍경, 실제와 상상, 기억과 감정은 서로를 지우는 대신 하나의 화면 위에 여러 겹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렇게 작가는 지나간 것을 현재로 다시 불러들이며, 익숙한 풍경 속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